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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Changing Stories

2019.07.31 11:49 | Posted by 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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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에 관해 알기 위해서 아래 논의를 한다.

1장 탁월성의 기원

탁월성은 지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이 있다. 지적 탁월성은 그 기원과 성장이 가르침에 있고,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이다. 성격적 탁월성은 본성에 의해 결정되지도, 본성에 반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본성에 의해 능력을 얻고, 나중에 활동을 발휘한다.

2장 성격과 습관

올바른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다.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3장 성격적 탁월성은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한다.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괴로워야 할 것에 고통을 느끼도록 길러져야 하고, 이것이 올바른 교육이다(보상과 징계). 탁월성은 즐거움과 고통에 관해서 최선의 것들을 행하는 품성상태인 반면, 악덕은 그 반대의 상태로 가정. 우리가 선택할 세 가지-고귀한 것, 유익한 것, 즐거운 것-이고, 회피하는 세 가지-부끄러운 것, 해가 되는 것, 고통스러운 것-이다.

4장 품성상태와 행위

 

킹콩을 들다(2009)

2009.08.08 12:03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킹콩을 들다(2009)>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여자 역도 선수가 되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영화를 볼 때 관객이 처한 고유한 정황과 삶의 내력은 남들과 다른 지점에서 감동과 통찰을 만들곤 한다. 영화 <킹콩을 들다>가 그랬다. 이 영화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었다. 역도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제자도를 생각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도를 배우겠다고 목청껏 소리치는 여중생들의 모습에서 소명을 굳건하게 붙잡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왜 그럴까? 여학생이 역도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몸매도 망가지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돈도 벌기 어려운 종목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에서 역도를 지도하는 이지봉 선생님도 역도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다가 팔과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평생 지병을 가지게 된 분이었다. 역도부로 모인 6명의 학생들 역시 역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역도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은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이 역도에 이골이 나서 아이들에게 역도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던 선생님을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에게 역도를 가르쳐 주기 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한 때의 뜨거워진 마음으로 진로를 결정하고서 평생 후회할 수 있기에 묻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 따고 돌아와도 별로 주목받지 못할 건데 그래도 하겠느냐고. 타이어를 끌며 모래밭을 달리는 훈련을 하면서도 이래도 역도를 하겠느냐고.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그래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세상 일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잠시 잠깐 장난으로 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하겠다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생했는데도 사람들의 인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더더욱 나서기 어렵다.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결심은 굳건해야 한다. 이미 서러움과 눈물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일 자체가 좋아야 하고 그 일을 통해 얻는 기쁨을 알아야 한다. 이지봉 선생님의 질문은 마치 그리스도인에게 제자의 삶을 살겠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인정도 못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할 지 모르는데도 그 길을 가겠느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자기 전부를 내어 주는 사랑과 헌신

 

영화 속 아이들은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열심히 훈련을 받으며 준비했다. 자신의 전부를 쏟으며 사랑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함께 했기에 더욱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힘든 훈련만을 강요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본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제자도가 본을 보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듯이 아이들은 선생님을 통해서 역도를 배웠고 역량을 키웠다.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모든 교사들의 모범이 된 것은 예수님의 방식만이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훈련 프로그램과 좋은 시설로도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들고 우뚝 일어서라!!

이지봉 선샘님이 영자에게 써 준 편지의 마지막 당부는 "세상을 들고 우뚝 일어서라"였다. 이 말은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가르친 선생님이기에 할 수 있는 당부이다. 주는 것 없이 무책임하게 명령과 당부만 하는 사람의 말은 의지할 수도, 힘이 되지도 않는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제자들을 진정 제자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며 우리를 세워 주시고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신다. 성도들이 자기 힘으로 홀로 싸우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교회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르치고 보살필 수 있는가? 믿지 않는 직장의 동료와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별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조롱당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함께 가는 사랑을 보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기쁨으로 목청껏 소리쳐야 한다. 자기 전부를 주시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 길을 가겠다고. 이미 우리가 전부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지봉 선생님을 통한 아이들의 변화를 영화가 보여 주었다면 우리의 헌신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소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영화읽기: 체인질링(2008)

2009.04.17 17:21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체인질링(Changeling, 2008)>

이나 고아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920년대 미국 LA

영화 “체인질링”은 공권력의 거짓과 이에 저항하는 한 여인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1920-30년대의 LA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화국에 근무하는 크리스틴 콜린스는 남편과 헤어져 아들 월터를 키우고 있다. 어느 날 직장에서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크리스틴은 아들 월터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실종 당일에는 신고조차 받지 않았던 LA 경찰은 5개월이 되도록 월터를 찾지 못했고, 월터 실종 사건은 LA 경찰의 무능과 부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어 LA경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실종 5개월 만에 그들이 월터를 찾았다며 크리스틴에게 한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아이는 월터가 아니었다. 청소년 수사국의 캡틴 J.J 존스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엄마 크리스틴의 말을 묵살하고,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LA 시립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자기 아들을 찾고 싶은 엄마를, 공권력을 무시하는 정신 나간 여자로 치부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법 질서는 확립된 것처럼 보였고, LA 경찰에 대한 도전도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공적인 거짓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하지만 모두를 잠시 속이거나,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어도 모두를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격언은 그 때에도 유효한 것이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기 때문에(시편 5:6) 거짓에 기초한 권위와 질서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공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엄히 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불의한 재판을 저주하시고, 거짓된 증거로 판결을 왜곡하는 증인이 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출애굽기 23:2). 그 사회의 약자인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신명기 27:19)이라고 선포하셨다. 공적인 거짓말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무신론적 행동이다.

영화 속 브리그랩 목사는 LA경찰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고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크리스틴을 돕는다. 공권력에 대해 순종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목사로서 마땅한 자세라는 것을 그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약자에 대해 불공정한 권력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여 약자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그것이 진정 공권력을 바로 세우는 것이며, 공권력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진정한 권위와 신뢰를 되돌려 주는 것이기에 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브리그랩 목사의 도움과 크리스틴의 강단있는 저항으로 공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밝혔고, 그에 대해 책임도 묻게 되었다. 이 일이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잘못된 공권력 관행 전체를 개선할 수 있었고, 당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다. 이와 같이 공적인 영역의 변화는 중요한 것이다.

공익과 한 영혼 모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

공권력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이익이 소수의 이익보다 우선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소수의 누군가는 소외되고 배제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본질적인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거나 제한할 수 없다. 제한할 수 없는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 과정에서 다소 지체되고, 다수의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그 길을 굳건히 걸어가야 한다. 더구나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공적 거짓을 일삼는다면 우리는 무자비한 집단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약자를 억압하는 거짓에는 단호하고 공동체를 섬기는 공권력을 세워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영화읽기: 워낭소리

2009.04.15 22:43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워낭소리(Old partner, 2009)>

사랑수고

"워낭소리" 전과 후

"워낭소리" 이전 다큐멘터리 영화 최고 기록은 영화 '비상'의 3만 9072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3월 2일에 관객수 200만을 돌파했다고 하니 "워낭소리"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의 분기점이 된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불러모았을까? 분명 국내 영화 풍토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Mass market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기적이라고 할 만한데, 도대체 무엇이 기적을 일으켰단 말인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이다. 영화 제목이 말하듯이 이 영화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의 특별함을 말할 때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극영화는 아니지만 할아버지와 소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 소의 죽음은 그 어떤 극영화의 극적 긴장보다 강한 임팩트를 관객에게 준다.

관계가 중요하다

서로를 아껴주고 인정해주는 동반자의 관계는 그것이 소와 사람의 관계라 할 지라도 많은 사람에게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관계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진정한 관계성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소가 보인 우정의 관계성이 놀라고 공감하는 것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요1 3:18) 행하는 사랑이 희귀한 시대이기에 진정한 사랑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수고(살전 1:3)를 아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 속 할아버지와 소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진정한 관계성은 허공이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은 땀 흘리며 수고해도 감당하기 만만치 않다.


그래서 동역자가 소중한 것이다. 진정한 동역자를 만난 사람이 행복하고 동역자들이 많은 공동체는 행복한 것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며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가 필요하다. 거동하기도 불편한 나이에도 소에게 여물을 주기 위해 직접 소꼴을 베러 가고, 자신을 위하는 주인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해 수고를 한다. 이 고된 노동이 이들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다. 진심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으로 이루어진 인생

지인의 부모님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기다."

영화 평론가 이용철은 "죽기 전에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이 영화의 20자평을 했다. 영화는 관계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지만 동시에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서 이제는 두 분이 일을 하지 않고 쉬기를 바라지만 부모님의 뜻은 달랐다. 죽기 전에는 살아야 했고, 살아 있다면 노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인생을 평탄한 대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생의 실상은 경사진 비탈길을 가는 것이다. 수고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기 7:1)라는 외침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지경이 굴곡 많은 경사진 길이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며 섬긴다고 할 때 마냥 낭만적인 언설로 하는 것은 거짓이 되기 쉽다. 참고 견디며 수고하여야 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입으로만 떠드는 것은 사랑도 모르고 인생도 모르기에 나오는 거짓부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진실되게 행하여야 한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기 위해 힘든 노동의 수고를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영화 속 관계는 현실 속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교회 안의 우리의 관계성의 수준이 영화 속 관계에 비추어 비교평가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소의 특별한 관계성보다 더 강력한 관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관계성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뉘어지지 않으며,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가 보인 사랑의 수고를 생각하며 교회의 지체들을 용납하고 배려하고 사랑으로 섬겨가야 한다. 세상이 보여준 사랑의 수고가 잠든 교회를 깨우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세상이 보인 사랑의 수고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읽기: 지구가 멈추는 날

2009.04.15 22:37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200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지구와 인간, 땅과 죄인

최근 지구의 위기에 대해 경고하는 영상물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불편한 진실", "지구", "북극의 눈물" 등 많은 영상물들이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나타난 지구의 위기 상황에 대해 경고하며 전 지구적인 각성과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이 영상물들의 메시지의 칼끝은 언제나 사람을 향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지구의 위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지구 안에서 오직 인류이기 때문이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은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분명하게 지구 위기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고 있다. 위기에 처한 지구를 인간의 탐욕과 폭력적인 본성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외계인이 온다는 영화의 기본 설정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지구 위기의 주범으로 인간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외계 존재를 대표해서 온 클라투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멸종시키기 위해 지구에 오고, 그를 만난 헬렌박사는 그를 설득해 인류 멸망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는 종말의 때에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과 심판을 통한 회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종말 구조와 유사하다. 인간이 스스로 개선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이 영화와 성경 모두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판단에 따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인간이 처한 비참한 실존적 상황은 동일하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지만 인간이 죽으면 지구가 산다”라고 말은 인간이 이 지구에서 얼마나 무익하고 유해한 존재로 전락했는지 보여 준다.

영화에서 말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환경파괴인지 전쟁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인지 영화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토대인 지구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임에도 스스로 변화하려는 의지를 거의 가지지 않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원래 인간이 지구에 무익하고 유해한 존재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구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의 선하심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본연의 창조 목적을 왜곡시켜 버린 것이 죄인인 인간이고, 죄인인 인간이 이 지구에 해악을 미쳐 지구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창세기 말씀이 증거하듯이 땅은 죄인인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죄로 인한 고통의 강도가 점점 강해져 인류를 멸망시켜 지구를 보존한다는 발상도 이상하지 않은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죄는 인간이 살고 있는 행성 전체를 파국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죄로 인한 땅의 저주를 끊을 자,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 클라투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뜻을 돌이키지만, 그것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 속 해결책은 공동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먼저 수고하는 변화된 인간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나와 내 집단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인류와 지구 전체를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변화에 동참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일은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죄로 인해 시작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죄의 지배를 벗어난 사람이다. 죄로 인해 땅이 받고 있는 저주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부름 받고 권능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킬 그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이미 심겨져 있으며, 우리를 통하여 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겨자씨처럼 심겨진 하나님나라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는 지금 이곳에서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날 것이다.

test

2009.02.27 17:03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콰이어트 맨 He was a quiet man

 

Quiet Man의 소리 없는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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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필요한 존재인 사람

사람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고,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고, 친구와 이웃과 직장 동료들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사랑과 관심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몇 년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콰이어트 맨”은 그 물음에 답을 주는 영화이다.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왕따이며 실패자 밥 맥커널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5년 동한 한 집에서 살았지만, 그의 이웃들은 그를 새로 온 이웃처럼 여길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가 일을 열심히 하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사랑과 관심은 없고, 일에 대한 인정도 없다. 조롱과 무시만이 있을 뿐이다. 맥커널이 회사 건물을 폭파시키고, 동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을 꿈꾼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총기난사범이 되었어야 할 맥커널이 회사 동료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맥커널은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사랑도 명예도 성공도. 그렇다면 맥커널의 문제는 해결되었을까?

 

All you need is Love.

맥커널에게 영웅이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웅이 된다고 해서, 자신감이 충만해 진다고 해서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의 본질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커널은 최소 5년 이상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그 세계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가 진정 두려워 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떠나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도, 지금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결국 자기를 떠나고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는 과거로 돌아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는 진실로 소통을 원했다. 단 한 사람만 소통할 수 있었어도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냉장고에는 이런 메모들이 가득하였다.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단지 당신의 세계 속에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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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정 기쁘게 살고자 했던 순간은 바네사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받았던 때였다. 그 때에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그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려 주던 단 하나의 끈이 끊어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관계의 고리는 존재의 이유를 말해주고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준다.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은 살아가게 되고, 자녀들의 존재가 부모에게 삶을 감당할 용기와 힘을 주듯이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관계의 끈이 깨어지고, 관계 가운데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인해 깨어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사람들의 관계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관계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 등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사람(Quiet man)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영화읽기: 지구<the Earth>

2008.11.28 15:38 | Posted by 강언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지구 Earth


구속받은 자로 지구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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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리얼입니다   


"
지구 온난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구체적이지 않다. 구체적이지 않기에 그 실상을 알기 어렵다. 실상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인식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는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

영화 "지구"는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북극에서부터 남극에 이르기까지 보여준다.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찬미하는 것처럼 시작되는 이 영화는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북극곰 가족에 대한 것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아빠 북극곰은 겨울동안 태어난 새끼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난다. 겨우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느라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엄마곰과 새끼곰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먹이를 찾지만, 아빠 곰이 발 디디고 있을 곳은 점점 사라져 간다. 발을 디딜 얼음 자체가 녹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먹이를 구하기도 전에 아빠 곰은 물에 떨어져 버리곤 한다. 지금 이것이 "지구 온난화"가 가져 올 비참한 결과의 실체이다. 실체를 북극곰 가족이 벌이는 사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생 리얼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에 가장 적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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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고백합니다  

영화 속에는 북극에서부터 남하하면서 보여주는 지구의 모습에는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약육강식의 드라마가 매일매일 펼쳐지고, 4계절의 변화가 있고, 동식물들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자라나는 모습도 보여 준다. 이토록 아름답고 조화로운 지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물이 부족하고 지구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하는 사막은 점차 늘어가고 있으며 바닷 속 생명의 근원이 되는 플랑크톤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질서 있고 조화로우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이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난 것인가? 왜 아프리카의 코끼리 떼들은 수천Km를 행진해야 하며, 아프리카의 야생동물들이 물과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야 하는가? 왜 흑등고래는 적도에서부터 남극해까지 이동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는 결과이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지구온난화를 일으킨 주체가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정확하게는 죄인된 인간 때문이다아담의 때부터 땅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지구와 지구의 모든 동식물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구속 받은 자의 의식있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했다. 남극해까지 내려간 흑등고래에서 다시 북극곰의 장면으로 돌아오면, 먹이를 구하지 못한 북극곰은 그새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 있다는 것을. 북극곰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얼음이 흔들리고 있고 깨어져 버리고 있으며 먹이를 구할 틈도 없이 물 속에 잠기게 되고, 바다코끼리들과의 사투를 벌여 한 마리라도 잡으려 하나 상처만 입고 돌아설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과다하게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들이 북극금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인 것을. 우리의 편의를 위한 낭비가 지구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해 주지 않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속받은 사람들이 이 피조세계를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이다. 피조물들은 구속 받은 자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는데도, 정작 구속받은 자들은 별다른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면서 시기를 놓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우리의 죄악을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엄위한 명령이다.


Find out what you can do.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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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맘마미아 Mamma Mia》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




Thank you for the music.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다(호모 루덴스). 그리고 음악적인 존재이다(호모 뮤지쿠스). 노래하며 춤추며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중의 하나이다. 영화 “맘마미아”는 뮤지컬 “맘마미아”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원작이 “ABBA”의 히트곡들을 연결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음악을 더 중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내용의 전개나 구성 역시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이야기보다는 음악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소피의 결혼식과 소피의 아빠 찾기라는 큰 틀 속에서 영화는 전개되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소피가 부른 노래 제목처럼 음악이 주는 자유로움과 안식에 감사하게 된다.

 

속박에서 자유로

좋은 음악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특별히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음악은 삶을 새롭게 하고 활기를 준다. ABBA의 노래는 흥겨울 뿐만 아니라,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게 되는 가사들이다. 기존의 노래들을 엮어서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ABBA의 노래는 이야기를 통해서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ABBA의 노래들은 팝송이라는 이름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노래들이고, 20세기를 살았던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곡들이었다. 영화 속 도나는 자기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제한들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딸의 아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딸을 키웠고, 삶의 무게에 눌리기보다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간다. 도나의 모습에서 이 땅의 삶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잠시나마 얻는다. 특별히 이 땅 가운데 수많은 제약과 속박에 눌리며 살아야 하는 여인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도나와 소피가 보여주는 진취적인 모습은 삶의 무거운 짐들에 지쳐 유약하기만 한 보통의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심지어 어떠한 삶의 무게 앞에서도 당당해야할 신자들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지 않은가?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하라!! 하나님 안에서!!

영화의 끝부분에서 소피는 자신의 아빠를 찾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결혼식을 포기하고, 약혼자와 함께 더 넓은 세계로 떠난다. 소피는 여자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결혼의 속박마저 던져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것이다.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소피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면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삶의 무게들은 오직 사회적  속박들에만 있는 것인가? 영화가 말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유와 기쁨을 주는 가장 이상적인 삶일까?

진정 가장 자유로운 삶이 그 삶이라면 우리는 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삶으로 인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회적 속박이 전혀 없는 무인도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참 자유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끊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노래가 주는 위로와 기쁨은 의미 없다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노래가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위로를 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일시적인 것에서 잠시간 누리는 자유의 기쁨도 가치가 있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화평과 희락을 누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지혜롭고 의미있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춤추고 즐거워하라. 그리하면 일시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영원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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