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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리스 표절 논쟁



드라마 아이리스가 소설"후지산은 태양이 뜨지 않는다"를 표절했다는 소설가의 주장이 몇 주 동안 작은 논쟁이 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그 소설가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과 이에 대한 드라마 제작사의 입장 그리고 소설가의 재반박 기자회견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왜 언론은 최소한 스토리 라인이라도 비교하여 소개하고 독자들의 판단을 구하는 과정은 제외된 채, 왜 논란만을 전달하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 말이다. 하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는 언론사는 전무한 편이다 왜 그럴까? 그 과정이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논란이 된 소설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지금은 책조차 구입하기 힘든 상황이라 제대로 비교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에 소개해 놓은 줄거리만 보더라도 대략적인 비교는 충분히 가능하다.  드라마 "아이리스"는 전 세계에 비밀리에 활동 중인 다국적 군산복합체 혹은 그 이상의 조직인 '아이리스'가 한반도의 분쟁을 조장하는 음모에 맞서는 주인공 김현준과 남북한 관계자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후지산...."은 일본의 핵무장과 이에 남북한의 공동대응이 중요한 스토리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스토리라인 상으로 비교했을 때 이 둘을 유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소설"후지산.."(1999)이 이현세의 만화 "남벌"(1994)의 스토리라인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가가 주장하는 세부적인 일치점들은 장르 특성상 첩보 액션물 영화에 공통으로 나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알고 있는 일반인들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대중에게는 다만 아이리스 표절 논쟁만이 각인될 뿐이다. 진실은 중요치 않고 논쟁만 남는다. 그런데도 언론은 왜 이 상황을 방치할까? 언론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익이 진실보다 우선한다. 논란은 흥미를 유도하고 흥미는 기사를 보게 만들고, 그것이 자사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논란이 조기에 종결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 뿐만 아니라, 논쟁을 증폭시키는 것은 언론사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전가되지 않는 꽃놀이패이다.그러므로 언론 스스로 이런 논란을 정리하는 기사를 만들어내는 날은 앞으로도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논란이 되는 기사일수록, 기사 속에서 주장과 팩트를 구분하고 팩트만을 취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낚이며 언론사의 질 낮은 기사들의 스폰서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2. 한명숙 총리에 대한 검찰 기소 사건에 관하여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팩트만 정리하자면
곽영욱 전 남동발전 사장이 (인사청탁차 만났다는 것은 검찰의 주장) 2006년 12월 20일에 총리공관에서 한명숙 당시 총리와 정세균 당시 산자부 장관과 강동석 당시 건교부 장관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검찰이 체포영장에 밝힌 바로는 "석탄공사"사장 자리 청탁을 했다고 한다.
한명숙 씨는
2006. 04. 20 제 37대 국무총리 취임해서 2007. 03. 07 제 37대 국무총리 이임했고, 곽영욱 씨는2007. 04. 03 남동발전 사장 취임했다.
분명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정황과 개연성만으로 혐의를입증할 수는 없다.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검찰도 "5만불을 두고 나왔다"고 명기했겠는가? 직접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곽씨의 진술이 계속해서 번복되고 있고, 진술 이외에는 아직까지 인사청탁을 위한 대가성 뇌물이 건네졌다는 증거도 없다. 심지어 곽씨가 남동발전의 사장이 됐기 때문에, 석탄공사 사장 자리를 청탁하기 위해 돈을 건넸다는 곽씨의 주장 또한 무색해져 버렸다.
식사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도청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으며 도청으로 획득한 증거는 인정되지도 않는다. 뇌물은 공관에 "두고 나왔다"고 하니 누가 받았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실제로 "두고 나와"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까지 팩트 상으로는 검찰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수많은 정치인 뇌물 수수 사건에 대해서 검찰이 입증하지 못한 사건들이 숱하게 많다. 그런데 지금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기소는 그 이전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것보다 훨씬 입증하기 어렵다. 박지원, 박주선 의원 사건이 검찰에게 훨씬 쉬웠던 싸움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싸움을 검찰이 왜 시작했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 검찰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마 "혐의가 있어서 수사를 시작했다"는 아주 일반적인 설명 뿐일 것이다. 하지만 더 자세하고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검찰이 혐의가 나와도 포기했던 수 많은 사건들을 일반인들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는 기사는 검찰이 언론에 발표하는(혹은 흘리는) 수사상황이 대부분이 될 것이다. 언론에게는 소스 제공자와 논쟁 유발자가 필요한데 그 역할은 검찰이 전담하고 있고,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기소되면 우리나라에서는 검찰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기소되어 언론에 노출되는 모든 자에게는 화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혐의입증이 불가능하여도 이 싸움에서 검찰 또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있다.


1과 2의 사건 이외에도 수 많은 논란이 우리 사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팩트에 근거한 진실 규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실이 만드는 이익보다 거짓 논쟁이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내는 서글픈 현실의 틈바구니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고종석 씨의 글은 즐겨 보는 글 중 하나이다. 글이 깔끔하고 그 내용이 공감이 간다. 한 때 나는 그가 지나치게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지나친 중립은 오히려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기 며칠 전에 쓰여진 고종석 씨의 글은 그래서 의미있고, 자기 고백적이다.

<시사in> 101호, 고종석의 시사 에세이이다. 가능하면 원문으로 가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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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인에 대한 단상
나는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대통령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101호] 2009년 08월 17일 (월) 11:41:54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1971년 그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내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부정이 없었다면 그 선거에서 그가 이겼으리라 말하는 관측자가 많지만, 부질없는 소리다. 설령 그가 당선했더라도 박정희가 순순히 정권을 넘겼을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그는 그 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진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는지 모른다. 동토의 16년 세월을 보내고 1987년 그가 다시 대선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다른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한 짓이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 나는 투표를 하지 못했다. 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가 15대 대통령에 당선했다는 소식을 이역에서 듣고, 나는 기뻤다. 콧등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적어도 다른 대통령들에 견주면 그렇다. 내가 정치적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았던 시절이 그의 집권기 5년 동안이었다. 물론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유신 잔재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 단독 집권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것을 막무가내로 비판했던 민주주의자들을 나는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그런 ‘더러운’ 거래가 없었더라면, 자유주의 정권 10년은 불가능했을 게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


   
당선하자마자 그가 처음 한 일이 내란죄 수괴를 풀어주라고 현직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이라는 점도 매우 못마땅하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에게, 민간인 학살자 면책은 뒤숭숭한 일이었을 것이다. 17년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를 용서하는 것이 그의 가톨릭적 박애주의나 국내 정치적 타산에는 부합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1980년 5월 학살된 이들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난 정치 행위였다. 외환위기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양식 있는 자유주의자로서 어렵사리 늘린 서민 복지(예컨대 기초생활보장제)는 그 양극화를 중화하기에 태부족이었다. 전임 정권들에서처럼, 그의 정부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거듭 터져나왔다. ‘나라의 어른’으로서, 그가 자식들에게 사사로이 드러낸 집착도 보기 흉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역사와 대화할 줄 안 첫 대통령이었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나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없었으나, 그는 전임자들 누구보다 더 지적이었다. 그가 정치인의 자질로 꼽은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고스란히 체현한 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이었다. 그가 정적들의 비판 속에서 꿋꿋이 수행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이미 그의 재임 중에 긍정적 효과를 낳았고, 그 다음 정권에서 남북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의 정부 아래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극성기를 맞았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좌파 정책’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며 가장 비열하고 모난 언어로 그를 두들겨 패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소수파 정부라는 한계와 여론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도 사형제도 없애지 못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들어 처음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됐고 보안법이 그 사나운 발톱을 숨겼다. 독립 기구로 설치된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징 차원에서나 실제 차원에서나 인권 신장의 원기소가 되었다.

그의 집권기에 내가 쓴 시사 칼럼들을 훑어보니, 그에게 호의적인 것보다 비판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비판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게 강요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뒤쪽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와 넓은 의미에서 동향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호의를(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호의라 판단된 때라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게 하고, 그의 자잘한 잘못들에까지 엄격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1987년에도, 아니 투표권이 없었던 1971년에도 이미 나는 그의 지지자였음을. 그리고 나는 또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지난 쉰 해 동안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There are patriots who opposed the war in Iraq and there are patriots who supported the war in Iraq.
We are one people, all of us pledging allegiance
to the stars and stripes, all of us defending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 애국자도 있고,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애국자도 있습니다.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미국을 지키고 있는 우리 모두는 같은(하나의) 국민입니다.


오버마가 오늘 새벽(미국 현지 시각으로 1월 20일) 미합중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라크 전쟁과 정치적 견해 차이로 분열되어 있던 미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비전을 제시한 명연설 하나로 그는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연설에 담긴 비전의 가치를 알고, 그를 제대로 평가하는 미국은 아직은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피부색으로 차별받는 세상을 바꾸는 정도의 비전이 아닌, 정치적 견해 차이도 서로 용인하며 하나의 나라로 통합해 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 오버마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의 앞날을 축복한다.

우리나라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비전이며,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지도자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비행기 추락사고를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

부제: 위기의 시기에 지도자는 얼마나 중요한가?

 

               [사진 출처: 뉴욕AP=연합뉴스]

2009 1 15일 오후 3 27(현지시각) US 에어웨이 소속 1549편 조종사가 무전을 보냈다. “새와 두 번 충돌한 것 같다라고.

조종사가 비행 중에 새와 만난다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공군 기상대 예보장교로 근무하면서 날씨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조종사를 위협한다는 것을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기상 지원하던 공역에서 조종사들이 사고로 죽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US 에어웨이 소속 1549편 조종사는 F-4를 몰던 미공군 출신이었고, 위기 상황 속에서도 허드슨 강으로 안전하게 비행기를 비상착륙 시켰다. 위기의 상황에서 침착하게 교신하고, 승객들에게 상황을 알렸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비행에 집중하여 안전하게 상륙시킨 것이다.

 

기장의 이름은 체슬리 B 슐렌버그(57)였다. 위기의 순간에 위기를 책임지고 해결할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판단과 지휘에 따라 승무원과 승객들은 무사히 대피할 있었고, 사람의 사망자 없이 안전하게 구조받을 있었다.

 

그가 끝까지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도 물론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부분은 따로 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해야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일을 감당할 역량이 있었으며,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일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비행기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감당할 있었다.

 

그것이 리더가 감당해야 부분이다. 리더에게는 가장 많은 위험과 책임이 따른다. 자신의 잘못된 조종으로 모든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리더의 자리이다.

 

이 허드슨 강의 기적은 미국 사회에 중요한 상징적인 교훈이 될 것이다.  미국은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불러 일으킨 당사자이자, 그로인해 대공황 이후 최대의 불황을 경험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수장이 1월 20일에 바뀌게 된다. 오버마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위기는 도래했고, 지도자만 바뀌게 된다. 지도자가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해낼 역량이 있다면 오버마의 지휘 아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위기는 지구 최강의 리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울 수 없을만큼 힘든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좋은 리더도 극복하지 못하는 위기를 나쁜 리더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리더를 세워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결정이다.

 

허드슨 강의 기적은 미국인에게 상징 교육이 되어 지도자의 중요성을 각인시킬 것이고, 지도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미국인에게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때에 오버마 대통령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위기 극복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허드슨 강의 기적이 미국인에게 좋은 상징적 교훈이 되었다면, 지금 한국은 어떤 상징이 주어지고 있을까? 미네르바 구속, 4대 강 정비 사업 추진 등 분명 이 땅의 지도자도

[출처: AFP]


끊임없이 한국민에게 일관성있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 메시지가 위기 극복의 해법을 제시하고
국민을 한 마음으로 모으는 정직하고 지혜로운 메시지일까
?

 

미국과 한국이 동시에 위기의 국면을 맞고 있지만,
지도자도, 상징적 교훈도, 그에 따른 메시지도 다르다.

이 다름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강도사, 새해 인사드립니다.

2009.01.07 22:09 | Posted by 강언
2009년 새해 인사드립니다.

오늘 수요 오전 설교에서 역사를 변혁시킨 한 여인, 리브가에 대해서 설교하였는데

2009년에는 우리 모두가 변혁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하세요.

강 도사 드림.

" KBO는 신생구단이 5년 동안은 매각을 못하고 선수를 트레이드할 때는 KBO의 승인을 받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밝혔지만 미흡한 점이 많다."

출처: 스포츠 서울
'센테니얼 창단' 에 따른 궁금증 7가지

기사입력 2008-01-30 21:42 |최종수정2008-01-30 22: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3&aid=0001938916&

1. 박동희 기자, Fact에 근거한 단 하나의 글(기사참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원삼 사태는 구단의 존립 여부도 불투명한 히어로즈가 팀의 에이스를 팔아서 팀을 운영하려고 했다는 죄목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히어로즈를 유혹해서 다른 팀의 에이스를 얻은 삼성에 대한 비난으로 점철돼 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정직한 글쓰기로 인해 여론의 방향은 바뀌기 시작한다. 스포츠 춘추의 박동희 기자가 쓴 기사 하나 때문이다. 그 기사에는 6개구단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가 부족한 주장인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구두합의에 의해서 현금트레이드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합의에, 당사자인 히어로즈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정확하지 않다. 현금트레이드를 금지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다.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두산 단장마저 확인취재를 위해 인터뷰를 했을 때 확언하지 못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히어로즈는 그 계약서에 싸인조차 하지 않았다. 구두상으로 논의한 사항을 담은 계약서에는 현금트레이드 불가라는 내용도 없다. 구두상으로 논의했다는 증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면 언론에 공표하기라도 했는가? 올해 1월1일부터 3월말까지 모든 스포츠 기사를 검색해 보아도 그런 내용은 없다.

 혹시 착각을 했다면, 현대가 자금 부족으로 선수들을 현금트레이드를 하려고 했을 때,KBO가 제지했다는 내용은 있다. 그것은 KBO의 기금으로 현대 야구단을 운영할 때 KBO가 정상적으로 관여할 수 있을 때의 내용일 뿐이다. 그때의 현금트레이드 금지와 히어로즈 창단시 현금트레이드 불가는 연속성이 없다. 인수도 아닌, 창단이고, 계약서상에도 없으며, 구두로 합의했다는 증거도 어디에도 없다.(위의 기사 링크 참조 및 인터넷 검색 필수)

자, 그러면 이제 비난의 화살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2. 5개 구단에게 묻는다. "히어로즈와  현금 트레이드 5년간 불가"가 절대적인 사안이라면 왜 시도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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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를 제외한 5개구단에게 묻는 것이다. 5년간 현금트레이드가 절대불가 사안이면, 현금을 포함한 모든 트레이드가 불가한 것이다.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선수 네임밸류를 맺추기 위한 현금이라는 주장은, 모든 현금트레이드의 허용이 주관적 기준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타구단이 제시한 현금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10억까지 올라가서 포기했을 뿐이다. 돈의 여력이 있었다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공한 구단은 비난을 받고, 성공하지 못한 구단은 비난할 수 있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느 별에서 가능한 논리인가?

그러므로 5개 구단의 "삼성과의 게임 보이콧" "총재에 대한 법적 처분" 운운은 무자격자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 뿐이다.

이미 현금을 포함한 트레이드 시도 자체가 장원삼 사태에 대해 말할 자격 박탈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전체 프로야구의 존립과 발전을 생각하면서 항의할 수 있는 자격자는 오직 "야구팬"들 뿐이다.


3.KBO도 잘못을 인정하고 야구팬에게 사과하라.

KBO는 삼성과 히어로즈에게 사과해야 할 대목이 있다. 법적,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만 도의상, 야구계 전체 발전을 위해 삼성과 히어로즈에게 부탁과 간청을 할 수 있을 뿐이지, 명백한 합의 위반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히어로즈 창단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으로 트레이드를 불허하는 것도 KBO의 권한을 넘어서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히어로즈와 삼성에게는 간청을 해야하고, 6개구단에게는 꾸중을, 팬들에게는 무릎꿇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정서를 앞세워 Fact를 무시하면, 그것은 거짓과 허위이다.

정직성이 결국 이긴다. 부당한 일이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거짓에 기초해 공격하면 결국 모두 다 패자가 된다.

장원삼 사태로 교훈 하나라도 얻자.

p.s
박동희 기자는 이 사태 중에 유일하게 정직하고 의미있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이다. 내가 아는 한.
그의 존재에 감사한다.

기독교윤리학, ‘전쟁과 정치’ 7장을 읽고

전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파병국가의 국민이며 성도이며 공군중위로 근무했던 나의 실존적 고민을 중심으로

 강성호


나는 공군 중위였다.

신대원 입학 면접 때, 내가 뽑은 질문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 날 나는 공군장교 제복을 입고 갔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적절한 질문을 뽑았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인이었고, 또 스스로 지원하여 장교로 입대하여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 거부 이유가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것이라면, 나는 성도로서 군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의 대답은 “ 군대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 개혁교회의 입장은 군대는 교회의 안전 보장을 위한 기관이고,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병역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사명을 돕는다는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병역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었다. 그 때 나의 사회적 역할이 장교인 군인이었기에 군대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평소 군대에 대하여 정리한 입장1)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대답하고 면접을 끝낼 수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인 나에게 전쟁은 실존적 문제였다.

면접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나의 대답이 정당한 것인지 고민했다. 전쟁을 거부하고, 폭력과 살인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들의 입장에 대한 고민없이 대답한 나를 발견하였다. 이런 고민 때문에 지난 여름방학에 한동대 교수로 있던 김두식 교수의 책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를 읽었다. 그 책을 통해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당전쟁론에 대한 반박을 대하면서 전통적인 교회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평화주의가 옳고, 정당전쟁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서 성도인 우리가, 성도인 내가 고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라크전의 파병국의 국민이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전쟁에 대해 고민하고 답해야 한다.

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속한 존재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존재로 이 땅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이다. 전쟁이 있는 이 땅 위에 교회가 있기에 교회는 전쟁에 대해 입장이 필요하다. 「전쟁과 정치」 7장의 결론이 ‘평화를 향한 교회의 과제’인 것은 교회가 전쟁에 대해서 입장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어떤 입장에 서 있든, 반드시 교회의 과제와 교회의 책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으냐를 밝히는 것도 기독교 윤리학이 다룰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내용은 ‘교회가 전쟁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민은 우리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고민이어야 한다.

7장 결론의 말미에서, 저자는 교회를 종말론적 평화를 맛본 평화의 공동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교회의 고민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잇닿아 있음을 말해 준다. 평화의 공동체로서, 또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전쟁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고민 속에서 교회가 정당전쟁론을 취할 것인지 기독교 평화주의를 취할 것인지는 치열하게 고민하여야 할 그 다음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전쟁에 대한 교회의 진지한 고민 그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든 지금 필요한 것은 교회의 책임과 과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에서 ‘전쟁과 정치’의 제 7장의 내용을 통해서 교회사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전쟁을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라크전 파병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부터 교회와 우리가 고민을 시작하자.

파병연장 동의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먹고사니즘2)”에 빠진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현재 우리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하지만 앞에서 밝혔듯이, 전쟁은 하늘의 평화를 소유한 교회가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성도인 우리가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파병의 당사자인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지금 여기에서’를 강조한다.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태도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문제로서 ‘이라크전 파병 연장 동의안’이 우리에게 있고, 이라크 전쟁이 있다. 파병연장 동의안에 대한 고민을 교회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고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허형도형이다. 형은 내가 입대했을 때, 장문의 편지를 통해서 성도가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데 일조하는 것임을 주지시켰다.


 

2)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경제적 부분, 특히 생계의 부분이라는 이념을 뜻한다. 현재 모든 신문 및 기독교계에서도 횡횡하고 있는 것은 바로 ‘먹고사니즘’(맘모니즘의 또다른 변형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주)이다. 이 먹고사니즘에 근거한 비판이 가득한 것이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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