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책 음악

영화읽기: 워낭소리

by 강언 2009. 4. 15.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워낭소리(Old partner, 2009)>

사랑수고

"워낭소리" 전과 후

"워낭소리" 이전 다큐멘터리 영화 최고 기록은 영화 '비상'의 3만 9072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3월 2일에 관객수 200만을 돌파했다고 하니 "워낭소리"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의 분기점이 된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불러모았을까? 분명 국내 영화 풍토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Mass market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기적이라고 할 만한데, 도대체 무엇이 기적을 일으켰단 말인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이다. 영화 제목이 말하듯이 이 영화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의 특별함을 말할 때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극영화는 아니지만 할아버지와 소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 소의 죽음은 그 어떤 극영화의 극적 긴장보다 강한 임팩트를 관객에게 준다.

관계가 중요하다

서로를 아껴주고 인정해주는 동반자의 관계는 그것이 소와 사람의 관계라 할 지라도 많은 사람에게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관계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진정한 관계성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소가 보인 우정의 관계성이 놀라고 공감하는 것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요1 3:18) 행하는 사랑이 희귀한 시대이기에 진정한 사랑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수고(살전 1:3)를 아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 속 할아버지와 소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진정한 관계성은 허공이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은 땀 흘리며 수고해도 감당하기 만만치 않다.


그래서 동역자가 소중한 것이다. 진정한 동역자를 만난 사람이 행복하고 동역자들이 많은 공동체는 행복한 것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며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가 필요하다. 거동하기도 불편한 나이에도 소에게 여물을 주기 위해 직접 소꼴을 베러 가고, 자신을 위하는 주인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해 수고를 한다. 이 고된 노동이 이들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다. 진심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으로 이루어진 인생

지인의 부모님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기다."

영화 평론가 이용철은 "죽기 전에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이 영화의 20자평을 했다. 영화는 관계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지만 동시에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서 이제는 두 분이 일을 하지 않고 쉬기를 바라지만 부모님의 뜻은 달랐다. 죽기 전에는 살아야 했고, 살아 있다면 노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인생을 평탄한 대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생의 실상은 경사진 비탈길을 가는 것이다. 수고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기 7:1)라는 외침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지경이 굴곡 많은 경사진 길이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며 섬긴다고 할 때 마냥 낭만적인 언설로 하는 것은 거짓이 되기 쉽다. 참고 견디며 수고하여야 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입으로만 떠드는 것은 사랑도 모르고 인생도 모르기에 나오는 거짓부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진실되게 행하여야 한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기 위해 힘든 노동의 수고를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영화 속 관계는 현실 속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교회 안의 우리의 관계성의 수준이 영화 속 관계에 비추어 비교평가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소의 특별한 관계성보다 더 강력한 관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관계성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뉘어지지 않으며,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가 보인 사랑의 수고를 생각하며 교회의 지체들을 용납하고 배려하고 사랑으로 섬겨가야 한다. 세상이 보여준 사랑의 수고가 잠든 교회를 깨우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세상이 보인 사랑의 수고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