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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발견

오이디푸스의 예언자, 앨 고어, 진리의 힘

by 강언 2008. 12. 16.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희랍비극은 그 극의 내용보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더 유명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고전을 알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책을 읽어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많기에 그 주제에 대해서 한 마디 정도 거들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는 비단 소포클레스 만이 다룬 것이 아니라 희랍 비극의 3대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모두에게 공통으로 사용된 소재였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느냐면, 우리가 알고있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몇가지 사실과 그 것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역시 가장 유명하겠지만, 오이디푸스는 왕인 아버지를 우연히 죽이게 되고 (물론 자신은 자신이 죽인 이가 아버지인것도 알지 못하고, 그가 테베이의 왕인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런 오이디푸스가 왕으로 추대되고, 당시 관습을 따라 왕의 아내인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테베이에 여러가지 안 좋은 일이 있자, 오이디푸스는 그 일의 원인을 밝히려하고, 그 이유가 선왕을 죽인 사람때문인 것을 알고, 그 죽인 자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는 오이디푸스가 그 살인자를 찾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를 불러서 살인자에 대해 묻는다. 그 때 예언자는 괴로워한다. 누가 살인자인지 알기 때문이다. 바로 죄를 추궁하고 있는 이가 죄인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오이디푸스에게 말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알기를 원했다. 결국 예언자가 살인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얘기하자, 오이디푸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 당신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헛된 말을 하는 것이요?
  그런 말을 퍼뜨리는 이유가 무엇이요?"
예언자는 답한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속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사실 앞에 장황하게 쓴 말들은 예언자가 한 바로 위에 말을 위해 쓴 것이다. 진리는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 진리가 강력하게 사람들을 움직일 것이라는 것.

왕의 권세앞에 당당히 말하는 예언자. 물론 그가 말한 진리라는 표현은 진실에 더 가깝지만, 그가 말한 '진리의 속성'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이다.

왕 앞에 그 말을 하면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럼에도 당당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을 결정하는 문제로 미국 전역이 시끄럽고 플로리다가 시끄럽고 팜비치가 시끄러웠다. 그 당시 신문을 읽다가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팜비치 선거관리 위원 중 한명이 이와 같은 말을 했다. 당시 상황은 플로리다 주정부가 미국시간 14일 5시로 집계를 마감했고, 그 이후에 검표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발표했다. 그 때 그 할머니 선관위원(민주당 당원이긴 하지만)이 하신 말은

"팜비치 유권자들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만일 그걸 확인하는 게 불법이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나는 가겠다"

 
였다.

물론 그가 민주당 당원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그의 태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옳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불법일 때,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진리를 지켜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일까? 진리는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의 재검표(수작업을 통한 재검표까지)가 대선 결과에 반영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정확한 민의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고, 만약 자신이 그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낼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그는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한다. 그 일을 통해 감옥에 가고, 죽음이 오더라도 말이다.

왜 바울이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않고, 죽음또한 두려워하지 않았게는가? '복음은 지키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진리'로 믿고 있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민주당 그 할머니처럼 최소한 자신이 믿고 있는 그 사실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갈 각오는 있어야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다. 증인. 진리의 증인인 것이다. 증인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사실을 말함으로써 당할 모든 위험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를 증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말한다면, 성경은 그 믿음을 증거하라고 한다. 뭐 눈에 보이는 것 하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목숨을 걸고 지켜낼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왜 성경에서 '믿음'을 경주하는 것, 끝까지 달려가 결승점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는지는 '진리를 증거하는 삶'이 일시적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청년때만 증거하다가 나이들면 그 진리를 회의하고 있다면, 이미 그 진리는 그에게 있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결코 일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성이 없는 진리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증거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이디푸스 왕 앞에 선 예언자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된다.

 
" 진리는 그 속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 말은 성경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딤후0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진리는 그 속에 강력한 힘을 담고 있다. 그래서 진리를 증거하는 이는 이 사실을 알기에 언제나 당당할 수 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