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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한 손(느헤미야 2:1-10)

by 강언 2016. 4. 26.

하나님의 선한 손


제가 3주 전 목요일 새벽에 느헤미야 1장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본문일뿐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본문입니다. 

3주 전 나눈 말씀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저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무작정 메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운 약속을 신실히 지키는 분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1장 11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때에 왕의 술맡은 관원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 우리로 치면 12월이고, 2장 1절에는 니산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3-4개월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느헤미야가 몇 달동안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왕을 섬기고 있다가 왕 앞에 나아가 포도주를 따라 드렸습니다. 주석서들을 살펴보면 그 시기가 페르시아의 축제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 앞에 포도주가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고, 술맡은 관리인 느헤미야가 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수 개월동안 왕을 섬기면서 왕께 이야기할 가장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생각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왕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왠만큼 총애를 받기 전에는 하면 안되는 행동입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관리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황제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인물로 의심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띄면 안됐습니다. 두려운 기색을 띄면, 왕에게 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수개월동안 한 번도 슬픈 기색을 왕에게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왕에게 포도주를 건네는 순간 느헤미야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왕이 충분히 눈치챌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느헤미야에게 물어봅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이 말이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왕이 이렇게 물을 때는 정말 걱정이 되어서 묻는 것일수도 있지만, 어찌 신하인 니가 내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느냐? 나를 섬기는 것이 그리도 힘드냐는 뜻으로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고, 괘씸죄에 걸려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웠지만 왕에게 대답합니다.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지만 이 순간을 기도하며 준비해왔기에 가장 적합한 말을 왕에게 전합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왕을 축복하는 인사를 드린 후에 예루살렘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들이 불타 버린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느헤미야가 쓰는 표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하고 있는 말을 보면 느헤미야가 얼마나 세심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이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민족적인 면이 부각되고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의 국가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도시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만 말합니다. 구체적인 나와 내 민족의 상황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고향이 있기 마련이고, 조상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 있기 마련인데, 그 도시가 황폐하게 변해 버렸고, 성문이 불타고 있다는 말은 민족과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으며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 말입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므로” 


제가 얼굴에 어찌 근심이 없겠습니까? 라는 말로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의 전달이라기 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상대가 공감할 수 있게 전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일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운 인간관계를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마음에 공감했습니다. 자신이 그 상황이라도 마음이 아프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왕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왕이 소원을 물어 놓고 거절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들어주지 않을 소원이라면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이 이렇게 물었을 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 즉시 기뻐하며 왕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에게 얘기하기 전에, 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느헤미야로부터 본받아야 할 기도의 자세입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이 뛰어나면 그저 내 능력으로 하면 되겠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성공하는게 삶의 목표라면 죽도록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에게 임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원하고 기도하는 바를 위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이 고백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이 말을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