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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의 글

by 강언 2008. 3. 23.
토요일, 여러 가지 마음이 지쳐서 김교신 선생의 '인생론'을 꺼내 읽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묻어 있었다.

글은 선명했으며 통찰력이 있었다.

암송의 필요성에 대해서 쓴 글도 인상 깊었다.

---------------------------------------한겨레의 기사---------------
김교신, '조선산 기독교'를 온 몸으로 살다

필독을 권하고 싶은 책 <김교신>

이 책이 처음 시중에 나왔을 때(1980년 11월)는 우리 땅은 군화 발 앞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캄캄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5·18을 부끄럽게 비켜서고 난 직후 "우리의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를 되뇌며 두리번거리고 있던 사람들, 특히 "우리 땅에서 복음이, 크리스찬이,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로 골몰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가느다란 한줄기 빛이었다.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가

그 동안 친구들과 제자들에 의해, 무교회주의자를 비판하는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김교신에 관한 조각 글들이 신문, 잡지와 일반 대학원, 신학 대학원 논문들을 통해서 발표되기도 했으나 그의 전모를 단 한 권의 책 속에 조망시킨 것은 이 책이 처음 일 것으로 안다.

나는 1970년대 중반 제법 내공이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어느 노인들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해 지나치듯 몇 차례 김교신이라는 이름을 주어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릇처럼 청계천 고서점을 뒤적거리다 누렇게 변한 김교신의 구약 성서 강해 단편을 우연히 발견해 읽고 탄성을 내질렀던 기억이 있다.

전 연세대 교수였던 김동길은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두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중 첫 손가락에 김교신을 꼽겠노라고 했다. '두레 공동체 운동'의 김진홍 목사는 그의 여러 편의 설교와 글에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 신앙을 깊이 흠모하는 마음을 토하였고, 어느 미주 집회에서는 한때 그가 주도하여 발간했던 <성서한국>이 김교신이 전력을 다하여서 발간하였던 <성서조선>에 담긴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것임을 밝혔다.

김교신의 양정학교 제자였던 손기정은 마라톤 동경 예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자신을 보고 선도차에서 시종 눈물을 훔치던 스승 김교신의 눈물만 바라보고 뛰어서 끝내는 우승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인물 평전으로, 성품이 강직하다 하여 붙여진 '양칼'이라는 별명과 함께 '컨닝'하는 제자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던, 소외당한 소록도인에게 '문둥아!'라는 '연애편지'를 쓰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그리고 끝내는 흥남 질소 공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심장에서' 마지막으로 체험한 '민족' 속에 누웠던, 한국의 예레미야 김교신의 신앙 유산과 삶을 정리하고 평한 것이다.

1902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1920년 6월 동경 유학 중 결신하여 그곳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에 회의를 느껴 일본의 반전·반제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신앙 수업을 했다.

그는 1927년 귀국하여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양인성 등과 함께 <성서 조선>을 창간, 1930년 주필로 편집, 발행을 책임지면서 심혈을 기울였고 중세기 수도승 같은 경건 생활을 계속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어 김교신은 1924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권두언 '제와'(죽은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의 개구리를 묘사하여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썼는데 이 표현이 민족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하여 폐간과 함께 피검, 함석헌, 유달영등 1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흥남 질소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의 복리를 위해 진력하며 발진 티프스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해방을 4개월여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여기 함께 일했던 외과의사 안상득 앞에서 숨지기 전 힘없이 그가 토한 마지막 말을 적어본다.

"안 의사,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 40 평생에 처음으로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보았소…. 이 백성은 참 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빵보다도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냐고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으나 일꾼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공장에서 만난 '민족'

김교신에게서 '조선'을 빼고 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교회사를 쓴 민경배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은 진리에 대한 충성과 함께 민족의 얼과 양심의 표현"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교신은 구미 선교사들의 성서 해석과 복음 이해의 유풍을 벗어나서 조선 사람의 다리로 체험되어지고 조선 사람의 심장으로 녹아진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처절한 내적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존재 이유'를 캐내기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했고, 결국은 뒤늦게 고난 당하는 민중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섭리사적 실존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존재이유'를 체험코자했다.

이 책의 저자는 섭리사적 민족의식에 터전한 김교신의 신앙적 몸부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이 책은 김교신의 삶의 발자취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한 '말의 전달'과 '깨달음'에 그 궁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총체적 의미로서의 복음(예수의 말씀과 삶)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창조된 '민족' 속에 들어가 영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 속에 개인주의적 이기와 정치적 경박까지도 벗어나 고난 당하는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깊은 영적·도덕적 구원을 기원하는 김교신의 순영적 민족 구원의 신앙이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절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도로서는 혹자는 기도생활의 법렬의 경을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 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조선> 창간호 '성조선의 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