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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맘마미아 Mamma Mia》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




Thank you for the music.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다(호모 루덴스). 그리고 음악적인 존재이다(호모 뮤지쿠스). 노래하며 춤추며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중의 하나이다. 영화 “맘마미아”는 뮤지컬 “맘마미아”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원작이 “ABBA”의 히트곡들을 연결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음악을 더 중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내용의 전개나 구성 역시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이야기보다는 음악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소피의 결혼식과 소피의 아빠 찾기라는 큰 틀 속에서 영화는 전개되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소피가 부른 노래 제목처럼 음악이 주는 자유로움과 안식에 감사하게 된다.

 

속박에서 자유로

좋은 음악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특별히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음악은 삶을 새롭게 하고 활기를 준다. ABBA의 노래는 흥겨울 뿐만 아니라,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게 되는 가사들이다. 기존의 노래들을 엮어서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ABBA의 노래는 이야기를 통해서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ABBA의 노래들은 팝송이라는 이름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노래들이고, 20세기를 살았던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곡들이었다. 영화 속 도나는 자기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제한들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딸의 아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딸을 키웠고, 삶의 무게에 눌리기보다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간다. 도나의 모습에서 이 땅의 삶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잠시나마 얻는다. 특별히 이 땅 가운데 수많은 제약과 속박에 눌리며 살아야 하는 여인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도나와 소피가 보여주는 진취적인 모습은 삶의 무거운 짐들에 지쳐 유약하기만 한 보통의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심지어 어떠한 삶의 무게 앞에서도 당당해야할 신자들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지 않은가?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하라!! 하나님 안에서!!

영화의 끝부분에서 소피는 자신의 아빠를 찾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결혼식을 포기하고, 약혼자와 함께 더 넓은 세계로 떠난다. 소피는 여자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결혼의 속박마저 던져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것이다.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소피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면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삶의 무게들은 오직 사회적  속박들에만 있는 것인가? 영화가 말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유와 기쁨을 주는 가장 이상적인 삶일까?

진정 가장 자유로운 삶이 그 삶이라면 우리는 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삶으로 인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회적 속박이 전혀 없는 무인도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참 자유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끊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노래가 주는 위로와 기쁨은 의미 없다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노래가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위로를 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일시적인 것에서 잠시간 누리는 자유의 기쁨도 가치가 있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화평과 희락을 누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지혜롭고 의미있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춤추고 즐거워하라. 그리하면 일시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영원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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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책 음악  |  2008/11/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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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다크 나이트》

말세의 때에 어떻게 살 것인가?


말세의 고통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을 언급하였다. 이 말씀을 확증이라도 하듯이 세상은 점점 고통이 커져 가고 있다. 말세의 고통은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부조리함이다. 의인이 고통 받고, 악인이 활개를 치는 삶의 부조리는 우리네 인생에서 넘쳐나고 있고, 삶의 날이 더해갈수록 인생의 부조리한 단면도 더 알게 된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통에 반응한다. 순응하며 살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세상을 망치려 한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는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의 면면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과 세상을 혼돈 가운데 몰아 넣으려는 사람. 배트맨과 조커는 말세의 고통을 대하는 양 극단인 것이다.

“영웅으로 죽거나, 결국엔 스스로 악당이 되는 거지”



조커는 과거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입이 찢어진 상처를 설명하는 말을 통해, 그가 겪은 고통을 추론할 따름이다. 아버지가 칼로 입을 찢은 것이나 자신이 스스로 입을 찢은 것이나 둘 다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인생의 고통을 경험했고, 온 세상을 혼란과 절망에 빠뜨리는 혼돈의 사도가 되어 버렸다. 그는 돈이나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며 진정한 악의 구현을 위해 투신한 사람이다. 또한 조커는 인생과 사람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착하게 굴 뿐이며, 실상은 내재된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온갖 부패와 범죄와 얼룩 진 고담시의 시민들은 조커가 벌이는 사건 사고를 통해 본성의 추악함을 드러내고 만다. 고담시민들은 자신의 안녕을 위협하는 조커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조커가 내세운 희생제물을 찾느라 혈안이 된다.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보다 나의 안위를 보장받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악이 만들어내는 비극을 피하려고만 할 뿐, 악을 제어하거나 제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자신을 악한 상태로 밀어 넣는다. 그것이 조커가 가장 바라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지방 검사 하비 덴트는 정의감이 가득한 정의의 사도였으나 조커에 의해 애인이 죽자 그는 이름 그대로 “투 페이스”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무법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 결국 정의의 사도였던 그도 자신이 인생의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 조커의 방식을 따라간 것이다. 하비 덴트는 자신이 한 말대로 결국 “스스로 악당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악한 구조는 절망의 사람들을 양산해 낸다. 정말 세상이 망해 버리길 바라며 세상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로 세상이 점점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커가 사람들을 향해 내뱉는 말들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인생은 부조리하고 절망과 분노를 쏟아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성을 들을 것인가?


배트맨은 하비 덴트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뒤집어 쓰며 “어둠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도덕률과 자신의 명예 가운데 도덕률을 선택한 것이다. 악의 화신인 조커는 하비 덴트를 “투 페이스”로 만든 것처럼, 배트맨도 절망 속에 악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악은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더욱 더 절망에 빠져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더욱 더 모질게 행동하여 그 사회 전체가 더욱 악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결국 스스로 악당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하지 마라. 사회가 악해지더라도,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억울함이 있더라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계시다. 하나님은 상황에 매몰되는 하나님이 아니며,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 상황에 매몰되기를 바라는 조커의 음성과 상황을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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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책 음악  |  2008/10/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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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6 03:47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ㅋ 배트맨도..이런 해석이 가능하군요. 형.
오늘은 다 읽었어요.

게다가 감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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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균
2008/10/23 14:09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생명나무 11월에 실린 글을 읽고 들렀습니다. 좋은 글쟁이를 만나 기쁩니다. 맘마미아를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구나, 몇몇 설교자들이 맘마미아에 대해 긍정보다는 부정의 말을 많이 하기에 처음 그 영화를 보는 것이 꺼려졌더랬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니 그렇게 나쁜(?) 영화가 아니더군요. 일찍 형제의 글을 보았더라면,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보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그 시각의 균형이 마음에 듭니다. 많은 것을 기대하게 하는군요. 좋습니다. 다음호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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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균
2008/10/23 14:13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참, 위의 글도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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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6:13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정용균 목사님!! 이곳까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글쟁이라고 불릴만하진 않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만 가득하답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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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크로싱》

누가 고통 당하는 자들의 이웃입니까?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사의 질문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묻고 스스로 답하였다. 다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 달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이웃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사랑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가 고통당하는 자의 이웃인가?

예수님의 비유 속에 강도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다. 그를 보고도 외면했던 두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며, 그들은 성전에서 섬기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사람이었다. 그들의 직분이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돕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외면해 버렸다. 그들의 눈에 강도 만난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누구도 길 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을 이웃이라고 선뜻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웃이 아니기에 외면하고, 보고도 피하여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직분자들의 불순종에 대비되는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길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 우연히 강도 만난 자를 보게 된 것이다. 또 그는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직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 되어 준다. 고통 당하는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들여 수고하여 도와 줌으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

하나님께 풍성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가장 절실하게 찾는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서 고통 당하는 자들이다.


누가 북한 주민의 이웃인가?

“크로싱”은 오늘 한반도 땅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영화이다.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북한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생명을 걸고 남한으로 넘어오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탈북과 입국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족의 처참하고 생생한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진실”이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아이들이 받는 학대와 고통, 북한의 인권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외면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 이웃 중에 학대와 기근과 죽음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영화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족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나야만 했던 아버지는 뜻하지 않게 한국으로 오게 되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열 한 살의 아들은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특별히 영화적 메시지를 논하는 것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가장 끔찍한 일의 실상을 아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고통 당하는 현실을 보고 공감하고,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분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도 큰 진전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 내 새터민(탈북자의 새 명칭)만 2007년 현재 1만명이 넘어선 상황에도 한국 내 새터민과 북한의 주민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율법사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강도 만난 자를 도운 것은 하늘의 천사가 아니었다. 고통 당하는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게 된다. 이 일을 감당할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당한 자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도운 것처럼, 우리도 “크로싱”을 보고 고통 당하는 자들의 눈물을 알고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미 들어와 있는 새터민을 차별 없이 대하고, 우리 마음 속 차별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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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책 음악  |  2008/09/2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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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

아슬란이 잊혀진 나니아 나라

전편에서 나니아 나라를 15년 동안 통치했던 4남매는 1년 만에 다시 나니아로 돌아온다. 하지만 나니아의 시간으로는 1300년이 훌쩍 지나버린 뒤였다. 그 시간동안 나니아는 텔마린족에게 점령되어 무자비한 미라즈 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텔마린 족의 왕위 계승자인 캐스피언 왕자와 페벤시 4남매가 힘을 합쳐 미라즈 왕과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1300여 년 전, 나니아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었다. 그리고 이를 믿고 의지한 아담의 후손들 때문이었다. 1300여 년이 지난 나니아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슬란이며, 아슬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나니아 나라의 어느 누구도 아슬란을 찾지 않았다. 페벤시 4남매가 돌아 왔지만, 그들도 아슬란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싸우려 하였다. 오직 한 사람, 루시만이 아슬란을 보았고, 아슬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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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의 침묵과 믿음


  텔마린 족이 다스린 300년 동안 아슬란은 침묵한다. 아슬란은 나니아 나라에서 보이지 않았다. 옛날 나니아 나라에 자신을 드러내며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루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슬란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나니아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 나라에서 아슬란은 잊혀지고 있고, 부정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슬란은 침묵한다. 나니아 나라의 백성들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들이 스스로 아슬란을 인격적으로 찾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의 나라에 아슬란의 통치를 구현할 존재가 바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 4남매가 나니아에 돌아와 궁극적으로 이뤄야 할 것이 바로 아슬란의 통치의 실현이었다. 나니아 나라의 전투는 피터 제왕 개인의 지략이나 용맹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피터의 지략대로 감행한 선제공격은 엄청난 희생을 치룬 패배를 얻었을 뿐이다. 나니아 나라를 회복할 사명을 가진 피터는 믿음이 부족하였다. 아슬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슬란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럼에도 아슬란을 보았다는 루시를 부러워하고, 자신에게도 표증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아슬란의 신실함을 믿고 찾는 사람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 나라에 아슬란을 신뢰하지 못하는 대리자가 승리할 수 없다. 아슬란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아슬란이 나니아에 없는 것은 아니다. 아슬란은 항상 나니아에 있었으며, 자신을 신뢰하며 찾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터와 대척점에 서 있는 루시는 아슬란과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했고, 그를 찾았고, 그를 향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가 아슬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슬란도 자신을 찾는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슬란을 찾는 사람이 아슬란을 만나고, 아슬란과 함께 아슬란이 창조한 세계에서 통치자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창조 세계에 승리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피터의 믿음 없음이 불러온 패배와 루시의 믿음이 이룬 승리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피터와 루시의 믿음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아슬란의 신실함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향해 끝까지 자신을 찾기를 기다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 함께 하시는 아슬란의 신실함이 창조세계인 나니아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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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은 이 피조세계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그러나 페벤시 남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려고 할 때가 많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 힘으로 전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실하신 주님을 찾고 예배하는 믿음을 바라시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땅을 회복시켜 갈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사명이다.


* 함께 보면 좋은 책: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홍종락 ․ 정영훈 저,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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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책 음악  |  2008/07/0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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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떻게 임하는가?__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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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평생을 말없이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형마저 타지에 공부하러 일찍 떠나 버렸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남아 있던 동생은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고 있었다. 형이 결혼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같이 사는 것이 불편해서 차고에 살아가는 이 사람이 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의 주인공 "라스"이다.

말은 없지만 착하고 성실한 그를 마을 사람들은 사랑했고, 형수 카린은 어머니처럼 그를 돌보려고 하였다. 모두들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기기를 바랬다. 하지만 어머니도 없이, 말없는 아버지와 보낸 유년기는 트라우마가 되어 대인관계를 어렵게 했고, 특별히 이성과 친해진다는 것을 힘들게 했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다. 형과 형수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형과 형수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게 사랑스럽지도, 기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가 데려온 여자친구는 사람이 아닌, 인형 "비앙카"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드러난 현실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눈에 보이는 현실로 판단하면 라스는 집안의 수치이고, 동네의 부끄러움이 되고 만다. 남을 배려하는 문화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집안에 이와 같은 일이 생겼다면 당장 호적이 파이고, 문밖으로 쫓겨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형수는 쉽고 넓은 길 대신, 좁고 어려운 길을 택한다. 라스처럼 인형 비앙카를 살아있는 여자 비앙카로 대하기로 한 것이다. 형과 형수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모두 라스처럼 비앙카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라스가 어렸을 때부터 겪어 온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라스를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다. 인형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어색하고 어렵고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라스를 돕기 위해 좁고 어려운 길을 모두가 함께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비앙카를 받아들이고, 비앙카와 친구가 될수록 라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게 된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직장 동료에게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된다. 아무도 이해해 줄 수 없었던 그의 상처가 결국 인형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것은 비앙카를 받아 주는 것이었다.

라스를 도와주기 위해, 비앙카를 사람처럼 대해 주는 가족들과 공동체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다. 그 길은 좁고 어려운 길이었으나 많은 사람을 구하는 사랑의 길이었고, 그 길 끝에는 회복되고 구원 받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라스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라스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그를 책망한다고 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희생과 수고의 터 위에서만 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라스는 고립된 외톨이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도 그들처럼

이 땅 가운데 상처입고 아픔 많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가족 안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는 상처의 생산자요, 소비자이다. 또 라스처럼 어렸을 때 받은 상처로 인해 정상적인 대인관계가 어려운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은 모습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