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수요일, 투표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타면서도부터 폭우가 쏟아져서 비가 조금 멎을 때까지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소나기로 내리는 폭우는 그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만 더 가자고 마음 먹은뒤, 방이역까지 가서 다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투표했습니다. 사람들은 적었고, 한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민의가 잘 반영되기만을 바랍니다. 조직표들이 동원되고 있다고 하는데, 조직표들이 민의를 거스르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전편에서 나니아 나라를 15년 동안 통치했던 4남매는 1년 만에 다시 나니아로 돌아온다. 하지만 나니아의 시간으로는 1300년이 훌쩍 지나버린 뒤였다. 그 시간동안 나니아는 텔마린족에게 점령되어 무자비한 미라즈 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텔마린 족의 왕위 계승자인 캐스피언 왕자와 페벤시 4남매가 힘을 합쳐 미라즈 왕과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1300여 년 전, 나니아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었다. 그리고 이를 믿고 의지한 아담의 후손들 때문이었다. 1300여 년이 지난 나니아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슬란이며, 아슬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나니아 나라의 어느 누구도 아슬란을 찾지 않았다. 페벤시 4남매가 돌아 왔지만, 그들도 아슬란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싸우려 하였다. 오직 한 사람, 루시만이 아슬란을 보았고, 아슬란을 찾았다.
아슬란의 침묵과 믿음
텔마린 족이 다스린 300년 동안 아슬란은 침묵한다. 아슬란은 나니아 나라에서 보이지 않았다. 옛날 나니아 나라에 자신을 드러내며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루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슬란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나니아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 나라에서 아슬란은 잊혀지고 있고, 부정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슬란은 침묵한다. 나니아 나라의 백성들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들이 스스로 아슬란을 인격적으로 찾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의 나라에 아슬란의 통치를 구현할 존재가 바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 4남매가 나니아에 돌아와 궁극적으로 이뤄야 할 것이 바로 아슬란의 통치의 실현이었다. 나니아 나라의 전투는 피터 제왕 개인의 지략이나 용맹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피터의 지략대로 감행한 선제공격은 엄청난 희생을 치룬 패배를 얻었을 뿐이다. 나니아 나라를 회복할 사명을 가진 피터는 믿음이 부족하였다. 아슬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슬란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럼에도 아슬란을 보았다는 루시를 부러워하고, 자신에게도 표증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아슬란의 신실함을 믿고 찾는 사람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 나라에 아슬란을 신뢰하지 못하는 대리자가 승리할 수 없다. 아슬란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아슬란이 나니아에 없는 것은 아니다. 아슬란은 항상 나니아에 있었으며, 자신을 신뢰하며 찾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터와 대척점에 서 있는 루시는 아슬란과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했고, 그를 찾았고, 그를 향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가 아슬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슬란도 자신을 찾는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슬란을 찾는 사람이 아슬란을 만나고, 아슬란과 함께 아슬란이 창조한 세계에서 통치자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창조 세계에 승리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피터의 믿음 없음이 불러온 패배와 루시의 믿음이 이룬 승리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피터와 루시의 믿음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아슬란의 신실함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향해 끝까지 자신을 찾기를 기다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 함께 하시는 아슬란의 신실함이 창조세계인 나니아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은 이 피조세계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그러나 페벤시 남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려고 할 때가 많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 힘으로 전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실하신 주님을 찾고 예배하는 믿음을 바라시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땅을 회복시켜 갈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사명이다.
신대원 입학 면접 때, 내가 뽑은 질문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 날 나는 공군장교 제복을 입고 갔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적절한 질문을 뽑았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인이었고, 또 스스로 지원하여 장교로 입대하여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 거부 이유가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것이라면, 나는 성도로서 군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의 대답은 “ 군대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 개혁교회의 입장은 군대는 교회의 안전 보장을 위한 기관이고,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병역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사명을 돕는다는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병역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었다. 그 때 나의 사회적 역할이 장교인 군인이었기에 군대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평소 군대에 대하여 정리한 입장1)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대답하고 면접을 끝낼 수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인 나에게 전쟁은 실존적 문제였다.
면접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나의 대답이 정당한 것인지 고민했다. 전쟁을 거부하고, 폭력과 살인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들의 입장에 대한 고민없이 대답한 나를 발견하였다. 이런 고민 때문에 지난 여름방학에 한동대 교수로 있던 김두식 교수의 책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를 읽었다. 그 책을 통해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당전쟁론에 대한 반박을 대하면서 전통적인 교회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평화주의가 옳고, 정당전쟁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서 성도인 우리가, 성도인 내가 고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라크전의 파병국의 국민이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전쟁에 대해 고민하고 답해야 한다.
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속한 존재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존재로 이 땅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이다. 전쟁이 있는 이 땅 위에 교회가 있기에 교회는 전쟁에 대해 입장이 필요하다. 「전쟁과 정치」 7장의 결론이 ‘평화를 향한 교회의 과제’인 것은 교회가 전쟁에 대해서 입장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어떤 입장에 서 있든, 반드시 교회의 과제와 교회의 책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으냐를 밝히는 것도 기독교 윤리학이 다룰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내용은 ‘교회가 전쟁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민은 우리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고민이어야 한다.
7장 결론의 말미에서, 저자는 교회를 종말론적 평화를 맛본 평화의 공동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교회의 고민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잇닿아 있음을 말해 준다. 평화의 공동체로서, 또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전쟁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고민 속에서 교회가 정당전쟁론을 취할 것인지 기독교 평화주의를 취할 것인지는 치열하게 고민하여야 할 그 다음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전쟁에 대한 교회의 진지한 고민 그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든 지금 필요한 것은 교회의 책임과 과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에서 ‘전쟁과 정치’의 제 7장의 내용을 통해서 교회사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전쟁을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라크전 파병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부터 교회와 우리가 고민을 시작하자.
파병연장 동의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먹고사니즘2)”에 빠진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현재 우리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하지만 앞에서 밝혔듯이, 전쟁은 하늘의 평화를 소유한 교회가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성도인 우리가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파병의 당사자인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지금 여기에서’를 강조한다.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태도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문제로서 ‘이라크전 파병 연장 동의안’이 우리에게 있고, 이라크 전쟁이 있다. 파병연장 동의안에 대한 고민을 교회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고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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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피드백 드립니다. 저는 다음검색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교회,참사람님의 해당 포스트는 지금 검색이 잘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해당 시간대에 색인과정에서 지연이 있었는것 같습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http://media.tab.search.daum.net/Search?site=11111111&q=%C3%B5%B5%D5+%B9%F8%B0%B3%B8%A6+%B5%BF%B9%DD%C7%D1+%C6%F8%BF%EC%B8%A6+%B6%D5%B0%ED+%C5%F5%C7%A5%C7%CF%B0%ED+%BF%D4%BD%C0%B4%CF%B4%D9&w=r_blog&SortType=1&ResultTyp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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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에 글 남겼습니다. 그 시간 때에만 안 된 것이 아니라, 대선 전에도 안 되었고, 지금도 안 되어서 포스팅한 것입니다.
지금은 제 글이 검색되는데 몇 달 전에도, 몇 주 전에도 되지 않았답니다.
"다음" 발전을 기원하며 올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