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씨의 글은 즐겨 보는 글 중 하나이다. 글이 깔끔하고 그 내용이 공감이 간다. 한 때 나는 그가 지나치게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지나친 중립은 오히려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기 며칠 전에 쓰여진 고종석 씨의 글은 그래서 의미있고, 자기 고백적이다.
<시사in> 101호, 고종석의 시사 에세이이다. 가능하면 원문으로 가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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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인에 대한 단상 |
나는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대통령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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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2009년 08월 17일 (월) 11:41:54 |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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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그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내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부정이 없었다면 그 선거에서 그가 이겼으리라 말하는 관측자가 많지만, 부질없는 소리다. 설령 그가 당선했더라도 박정희가 순순히 정권을 넘겼을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그는 그 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진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는지 모른다. 동토의 16년 세월을 보내고 1987년 그가 다시 대선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다른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한 짓이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 나는 투표를 하지 못했다. 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가 15대 대통령에 당선했다는 소식을 이역에서 듣고, 나는 기뻤다. 콧등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적어도 다른 대통령들에 견주면 그렇다. 내가 정치적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았던 시절이 그의 집권기 5년 동안이었다. 물론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유신 잔재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 단독 집권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것을 막무가내로 비판했던 민주주의자들을 나는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그런 ‘더러운’ 거래가 없었더라면, 자유주의 정권 10년은 불가능했을 게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
당선하자마자 그가 처음 한 일이 내란죄 수괴를 풀어주라고 현직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이라는 점도 매우 못마땅하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에게, 민간인 학살자 면책은 뒤숭숭한 일이었을 것이다. 17년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를 용서하는 것이 그의 가톨릭적 박애주의나 국내 정치적 타산에는 부합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1980년 5월 학살된 이들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난 정치 행위였다. 외환위기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양식 있는 자유주의자로서 어렵사리 늘린 서민 복지(예컨대 기초생활보장제)는 그 양극화를 중화하기에 태부족이었다. 전임 정권들에서처럼, 그의 정부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거듭 터져나왔다. ‘나라의 어른’으로서, 그가 자식들에게 사사로이 드러낸 집착도 보기 흉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역사와 대화할 줄 안 첫 대통령이었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나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없었으나, 그는 전임자들 누구보다 더 지적이었다. 그가 정치인의 자질로 꼽은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고스란히 체현한 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이었다. 그가 정적들의 비판 속에서 꿋꿋이 수행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이미 그의 재임 중에 긍정적 효과를 낳았고, 그 다음 정권에서 남북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의 정부 아래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극성기를 맞았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좌파 정책’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며 가장 비열하고 모난 언어로 그를 두들겨 패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소수파 정부라는 한계와 여론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도 사형제도 없애지 못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들어 처음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됐고 보안법이 그 사나운 발톱을 숨겼다. 독립 기구로 설치된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징 차원에서나 실제 차원에서나 인권 신장의 원기소가 되었다.
그의 집권기에 내가 쓴 시사 칼럼들을 훑어보니, 그에게 호의적인 것보다 비판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비판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게 강요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뒤쪽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와 넓은 의미에서 동향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호의를(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호의라 판단된 때라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게 하고, 그의 자잘한 잘못들에까지 엄격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1987년에도, 아니 투표권이 없었던 1971년에도 이미 나는 그의 지지자였음을. 그리고 나는 또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지난 쉰 해 동안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신앙의 눈으로 영화읽기: <킹콩을 들다(2009)>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여자 역도 선수가 되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영화를 볼 때 관객이 처한 고유한 정황과 삶의 내력은 남들과 다른 지점에서 감동과 통찰을 만들곤 한다. 영화 <킹콩을 들다>가 그랬다. 이 영화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었다. 역도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제자도를 생각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도를 배우겠다고 목청껏 소리치는 여중생들의 모습에서 소명을 굳건하게 붙잡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왜 그럴까? 여학생이 역도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몸매도 망가지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돈도 벌기 어려운 종목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에서 역도를 지도하는 이지봉 선생님도 역도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다가 팔과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평생 지병을 가지게 된 분이었다. 역도부로 모인 6명의 학생들 역시 역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역도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은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이 역도에 이골이 나서 아이들에게 역도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던 선생님을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에게 역도를 가르쳐 주기 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한 때의 뜨거워진 마음으로 진로를 결정하고서 평생 후회할 수 있기에 묻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 따고 돌아와도 별로 주목받지 못할 건데 그래도 하겠느냐고. 타이어를 끌며 모래밭을 달리는 훈련을 하면서도 이래도 역도를 하겠느냐고.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그래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세상 일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잠시 잠깐 장난으로 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하겠다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생했는데도 사람들의 인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더더욱 나서기 어렵다.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결심은 굳건해야 한다. 이미 서러움과 눈물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일 자체가 좋아야 하고 그 일을 통해 얻는 기쁨을 알아야 한다. 이지봉 선생님의 질문은 마치 그리스도인에게 제자의 삶을 살겠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인정도 못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할 지 모르는데도 그 길을 가겠느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자기 전부를 내어 주는 사랑과 헌신

영화 속 아이들은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열심히 훈련을 받으며 준비했다. 자신의 전부를 쏟으며 사랑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함께 했기에 더욱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힘든 훈련만을 강요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본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제자도가 본을 보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듯이 아이들은 선생님을 통해서 역도를 배웠고 역량을 키웠다.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모든 교사들의 모범이 된 것은 예수님의 방식만이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훈련 프로그램과 좋은 시설로도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들고 우뚝 일어서라!!
이지봉 선샘님이 영자에게 써 준 편지의 마지막 당부는 "세상을 들고 우뚝 일어서라"였다. 이 말은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가르친 선생님이기에 할 수 있는 당부이다. 주는 것 없이 무책임하게 명령과 당부만 하는 사람의 말은 의지할 수도, 힘이 되지도 않는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제자들을 진정 제자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며 우리를 세워 주시고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신다. 성도들이 자기 힘으로 홀로 싸우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교회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르치고 보살필 수 있는가? 믿지 않는 직장의 동료와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별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조롱당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함께 가는 사랑을 보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기쁨으로 목청껏 소리쳐야 한다. 자기 전부를 주시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 길을 가겠다고. 이미 우리가 전부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지봉 선생님을 통한 아이들의 변화를 영화가 보여 주었다면 우리의 헌신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소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본 리뷰는 Cetizen.com에서 진행하는 CYON ARENA 체험단 리뷰입니다
자료출처 :
http://cetizen.com -세티즌
원래 성장동영상은 아빠인 내가 맡기로 했다.
하지만 퀄리티가 좋지 않아서 엄마가 세 시간만에 뚝딱 만들었다.
아무리해도 그녀의 멘트 신공은 따라 잡을 수가 없다.
하린아~ 너도 복 받았고
나도 복 받았어. 좋은 엄마 좋은 아내를 만나서~
순서
6시-6시40분 식사
6시 40분
성장 동영상 상영 5분
안내멘트 1분
생일 축하 노래3분
안내멘트 1분
하린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시간 5분
안내멘트 1분
아빠의 말씀 나눔 5분
함께 기도
안내멘트 1분
친가, 외가 어른께 선물 증정 3분
안내멘트 1분
축복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5분
지리산 야생 녹차잎을 이용하여 직접 만드신 녹차입니다. 30년동안 직접 만드셨습니다.
장가를 잘 가서 이런 귀한 녹차를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고 마시고 있습니다.
옥션에 가서 가격을 보니 올해 만든 녹차는 10-15만원은 하더군요. 그 녹차들보다 훨씬 질 좋은 녹차인데 공짜로 마셔서 황송한 마음입니다.
요즘 교회와 주변 지인들에게 차를 맛 보여 드립니다. 사무실에 가져다 놓고 제가 우려서 차 한잔의 여유를 나눕니다.
언제 한 번 녹차를 나누는 번개모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녹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차 한 잔으로 평안이 임한다면 언제라도 대접하겠습니다.
모두에게 평안입니다.